
[황상열 칼럼6] 관리지역의 이해관리지역의 이해 - 나도 도시지역으로 포함시켜줘얼마 전 클라이언트로부터 경기도 양평군의 한 토지 검토를 의뢰받았다. 기존 골프장이 있고 주변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땅으로 전원주택을 개발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다. 우선 소유하신 토지 현황을 보니 ‘보전관리지역’과 ‘계획관리지역’으로 용도가 구분되었다. 다른 한건은 다른 지역 토지 개발에 대한 요청 건이었다. 파주 운정 신도시 건너편에 위치한 토지로 대규모 아파트를 개발하고 싶다는 의뢰였다.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토지를 분석하니 해당 지역 용도가 ‘계획관리지역’이다. 최근 용도가 계획관리지역인 토지 개발에 대한 문의가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기존 도시는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녹지지역의 도시지역에서 더 이상 개발할 수 있는 토지가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도시지역의 땅들이 거의 개발이 완료되면 그 다음으로 보는 토지들이 바로 이 관리지역이다. 관리지역은 바로 도시지역이 아닌 도시외지역에 속하고, 추후 도시지역으로 편입되어 개발할 여지가 있는 땅을 말한다. 우리나라 토지는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도시지역과 도시외지역으로 구분한다. 도시외지역은 관리지역, 농림지역,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구분된다. 이 중 관리지역은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상 의미는 ‘도시지역의 인구와 산업을 수용하기 위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거나 농업 진흥, 산림 보전을 위하여 농림지역 또는 자연환경보전지역에 준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작은 집이나 논,밭이 있는 지역들이 관리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 관리지역은 다시 계획관리지역과 생산관리지역, 보전관리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계획관리지역 도시 외곽을 벗어나 산이나 논,밭등에 많이 지정된다. 추후 도시지역의 편입이 예상되는 지역 또는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제한적인 이용·개발을 하려는 지역으로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한 지역으로 법상 정의하고 있다. 즉 계획관리지역은 추후 개발을 어느 정도 허용하여 주거지역, 상업지역등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토지라고 보면 된다. ☞ 보전관리지역은 “자연환경 및 산림보호, 수질오염 방지, 녹지공간 확보 및 생태계 보전 등을 위해 보전이 필요하나 주변 용도지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기가 곤란한 지역”에 법상 정의하고 있다. 계획관리지역보다 보전 성격이 강하다. 국립공원, 도립공원등 유명한 산에 많이 지정되는 용도지역이다. 제일 보전 성격이 강한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되지 않는 나머지 땅의 용도가 보전관리지역으로 보면 된다. ☞ 생산관리지역은 “농업·임업·어업생산 등을 위하여 관리가 필요하나 주변 용도지역과의 관계등을 고려할 때 농림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기가 곤란한 지역”에 법상 정의하고 있다. 바닷가 항구 근처 공유수면에 어업 생산이나 논, 밭이 있는 농업 생산 등을 관리하기 위해 주로 지정하며, 규제가 강한 농림지역이 아닌 땅의 용도로 보면 된다. 보통 관리지역에서 용적률은 80~100%이하, 건폐율은 20%이하로 규제하여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한다. 도시지역의 녹지지역과 컨디션이 비슷하다. 보통 4층 이하의 단독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이 가장 많이 지어진다고 보면 된다. 요새 은퇴 후 귀농이나 귀촌 목적으로 전원주택을 짓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도시지역의 자연녹지지역이나 계획관리지역의 토지가 그래도 개발이 용이하다. 단 진입도로가 반드시 접해야 그 토지의 활용도가 높다. 이처럼 땅을 개발하기 위해서 그 땅이 용도지역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각 용도지역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알면 투자하는 데 유리하다. <글: 황상열 토지개발전문가>- 도시계획 엔지니어/부동산 개발 기획 및 토지개발 인허가 전문가- 작가/강사/동기부여 강연가- 매일경제 칼럼 연재- 저서 <나를 채워가는 시간들, 마음세상(예정)-2017.12><미친 실패력, 더 로드-2017.5><모멘텀(momentum), 휴앤스토리-2016.4><되고싶고 하고싶고 갖고싶은 36가지, 시너지북-2015.7>- 양천구 도서관 강의, 한국 HRD 교육방송 출연등 20여 차례 강연(주제 : 인생 모멘텀 찾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 등) 관리자 I 2018-03-20
[김부건 칼럼3] 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거두는 법이다자기가 뿌린 씨앗은 자기가 거두는 법이다! 너에게서 출발한 것은 다시 너에게로 돌아간다. (出출乎호爾이者자, 反반乎호爾이者자也야. - 맹자편, 양혜왕 하)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말의 유래는 한의학에서 심한 감기로 몸에서 열이 날 때 취한제(取汗劑)를 쓰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여름 더위에 뜨거운 차를 마셔서 더위를 물리친다거나, 힘은 힘으로써 물리친다는 따위에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표현으로 변형이 되면, 내가 당한 것은 꼭 되돌려 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유 없는 심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요. 입장을 바꿔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만약에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거나, 큰 실례를 저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연, 그 당사자의 심정은 어떠한 마음일까요? 항상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증자는 “네가 한 언행은 네게로 돌아간다. 즉 선에는 선이 돌아오고, 악에는 악이 돌아온다.”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실로 인과응보적인 삶의 전형적인 형태’로 보입니다. 이는 ‘노(魯)나라와 싸움에서 추(鄒)나라 군대 장교가 33명이나 전사했다. 한데 그 아래 부하인 백성 출신 군인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추나라의 목공(穆公)이 이를 걱정하여 맹자에게 물었다. '평소 장교들의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보복을 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답니다. 그 상황이야 직접 보지 못했기에 상상만으로 추이 짐작할 노릇입니다. 과연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겠네요. 위기가 닥치면 조직 응집력과 사생결단의 전투력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지휘관의 현명한 지휘와 백성들의 충만한 사기(士氣)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른 개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먼저 존중해야만 하는 소중한 존재들인 것이지요. 어떤 결과를 맺고 싶은지는 자기 의사에 달렸습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짜증부터 냅니다. 하는 일이 불만족스럽다고 늘 인상을 찌푸리고 다닙니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저절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불평불만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이롭습니다. 나아가 주변 사람들도 비로소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겠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십시오. 그것이 소소한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긍정적인 기운을 자꾸 흡입하는 가운데에서 진정 다 같이 행복한 삶이 전개됨을 늘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Point 자신에게서 비롯된 나쁜 기운은 먼저 주위를 오염시키고 결국엔 다시 내게로 되돌아온다. 그만큼 좋은 기운이 배가될수록 결국엔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동양고전의 힘” 저자, 백작 김 부 건(현)무지개작가포럼 대표 / 토목엔지니어(→보유자격증 : 상하수도기술사)(현)서일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2017.8.28.~ )(현)성지토목기술공사 전무이사(2017.12.21.~ )(전)한국종합기술 상하수도부 상무이사(1996.4.1.~2016.7.6.)(현)한국건설교통신기술협회 기술심의위원(2016.10.1.~2018.9.30.)(현)인문학 작가 / 동기부여 강연자 (브랜드네임 : “동기부여기술사”) [이미지 출처] goole search; '출호이자 반호이자야', http://m.blog.daum.net/jiwonpyj/3291891관리자 I 2018-03-20
[박광수 칼럼7] 파랑의 심리학3미션-신의 주신 임무 신의 의지를 따른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 1750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롤랑 조페 감독이 만든 영화 <미션>이다. 1750년,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남미 오지에 있는 그들의 영토 경계 문제로 합의를 보았으나 유럽 한구석의 탁자 위에서 그은 선이 원주민 과라니족 인디언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사태를 일으킬 지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문명과 종교라는 이중 가면을 쓴 군상들로 침략과 전쟁이 주된 관심사 였다. 영화는 남미의 오지에 있는 과라니(Guarani)족을 선교하기 위해 간 신부 한명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이과수 폭포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장엄한 이과수 폭포는 그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인간 생명을 밀어내고 있었다. 앞서간 신부들의 절망적인 실패소식에도 불구하고 제수이트(Jesuit)회의 신부인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은 이과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다. 마침내 폭포를 올라간 그는 품에서 오보에를 꺼내든다. 그리고 들려오는 천상의 멜로디는 외부인에 대한 공포심과 증오, 적개심을 사랑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는다. 음악이 하늘의 소리이고 칼이 땅의 무기라면 음악은 칼보다 강하다. 가브리엘 신부는 오보에가 내는 음악으로 그들과 함께 동거 동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곳에 또 한명의 신부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칼과 갑옷 등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이과수폭포를 오른다. 노예상인이었던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는 그의 연인이 친동생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하고는 분노에 사로잡혀 친동생을 죽이고 괴로워한다. 그런 그에게 <가브리엘>신부는 신의 사랑을 전했고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헌신의 마음으로 가브리엘 신부가 간 오지를 찾은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동안의 죗값을 모조리 갚으려는 듯 자신에게 혹독할 정도의 고통을 주며 헌신의 길을 간다. “산을 옮길 만한 강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 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로드리고는 사도바울이 써 놓은 사랑의 메시지를 읽으며 신께 헌신의 마음을 다진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새로운 영토분계선 때문에 과라니족의 마을은 포르투갈 령(領)으로 바뀌게 되고 쫓아내려는 이들에 불복하여 그들은 최후의 싸움을 준비한다. 무저항 비폭력으로 맞서는 <가브리엘> 신부는 “무력이 옳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다.”고 설득하나, 폭력에는 폭력으로 저항하겠다며 <로드리고>는 결사항전을 외친다. 결국 과라니 족과 이들은 몰살당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살아남은 원주민 아이들은 배를 타고 떠나가면서 바닥에 있는 칼과 바이올린 중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장면이다. 이들에겐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은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 앞에서 한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회 신부들을 설득하기 위해 교황청에서 파견되었던 주교는 보고서를 쓰는데 그의 편지글의 마지막 구절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신부들은 죽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영혼은 다시 살아날 것이며 산 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목은 소통과 대화의 창구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사람과 함께하면 마치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거나 보호받는 듯이 느낀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봉사하는 삶을 산다. 평화, 확 트임, 긴장 이완, 치료의 느낌을 이런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파랑의 유연하고 조용한 힘이 그 원천이다. 파랑색은 무지갯빛 몸에서 목 부위와 공명하므로 파란색을 접하면 대화할 때 긴장하지 않고 침착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대화가 원활해진다. 온화하고 깊은 관용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고 양심적이고 책임감이 강하여 정신적인 리더가 된다. 자아를 드러내지 않고 공정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큰 신용과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파란색 조화가 깨진 사람은 타인을 지배하려 하는 마음이 강하다. 반대로 우월한 사람에게는 항상 복종한다. 고정관념을 갖고 있어 변하려 하지 않고 전통에 집착하여 타인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되기도 한다. 항상 규율과 감독을 요구하는 엄격하고 완강한 권위주의적인 과거 아버지 모습이 비춰진다. 약자일 경우에는 자신을 표현하기 어려워 목에 할 말을 담고 있지만 권위에 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지 못한다. 바로 기가 막혀서 그렇다.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여선생이 있었다. 이 선생은 수업을 할 때나 대화를 할 때 항시 잔기침을 하였다. 여고시절부터 시작되어 20여년이 지나도록 고쳐지지 않았다. 목에 부정적인 에너지가 담겨 답답함을 기침으로 내보내려는 결과였다. 이 선생님은 여고 3학년 시절 아버지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의지대로 대학을 선택하여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송두리째 꺾인 것이다.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미대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아버지는 반대였다. 화가가 되어서 어떻게 밥을 먹고 살겠느냐가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선생은 꿈을 포기 하지 않고 미대에 진학하기를 주장하였다. 단식을 감행했고 방안에서 나오지 않고 아버지와 대립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길 딸이 얼마나 있을까? 이 선생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몸도 죽을 것처럼 그녀를 아프게 했다. 특히 기침은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심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 선생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교대에 진학했고 졸업하자 선생이 되어 혼인도 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때 앓았던 감기의 후유증인 기침은 그녀를 평생 따라 다니는 고통이 되었다. 목 에너지가 손상을 입었는데 복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필자는 그 선생에게 지금이라도 아버지와 막혔던 꿈에 대한 대화를 나누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아버지의 육체는 땅에 묻혔지만 그 영혼은 여전히 선생님 마음 안에 존재하며, 날을 정해 조용한 방에서 아버지를 마음에서 불러내 대화하라고 했다. 선생은 한 밤 중 가족 모두가 잠든 사이에 골방으로 가서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서 나오자마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며 가슴 속에서 물결처럼 번지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좌절 시킨 것이 아니라 딸의 미래를 걱정하였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것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사랑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 선생은 가슴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눈물로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편안히 잠을 자고 났던 이 선생은 바쁜 출근 전쟁을 치른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문득 자신이 더 이상 잔기침을 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막혀 있던 목의 기운이 뚫어진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의 기운이 사랑으로 바뀌어 목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목의 기운이 막힌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하여 자주 분노를 발하며 소리를 잘 지른다. 명치끝이 단단해 지고 좌측 옆구리 아래에 딱딱한 느낌이 든다. 눈이 충혈 되고 입이 쓰고 갈증이 나거나 신트림이 올라온다. 몸을 이리 저리 뒤척이며 밤에 잠을 잘 못 이루고 자주 놀라 깬다. 화가 났을 때는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생기기도 한다. 하늘아래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영어단어 중에 liverish 란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흥분하기 쉽고 분노로 가득 찬이란 형용사이다. 간이란 단어 liver에 ish 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간은 분노 성냄 그것으로 인한 폭력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언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부인들은 남편들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남편이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낸다면, 맞서지 말고 ‘우리 남편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하고 이해하면 가정이 평화로울 것이고, 남편들도 부인이 ‘당신은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왜 허구한 날 시키기만 해요.’라고 하면 부인의 간덩이도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간의 기능을 조화롭게 고치는 일이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세상살이가 다 덧없음을 깨닫게 되어,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한 솔로몬의 지혜를 상기하게 된다.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는 솔로몬은 신을 향해 일천 번이나 제사를 드렸던 인물로 바로 이 목 에너지의 힘을 입어 신성으로 귀의하게 된다. 복잡한 현실 세계는 진리를 멀리하고 돈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목숨만을 위해 살고 있다. 의식 없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 음식, 옷, 집과 가구 등등의 것에만 관심을 갖고 살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삶이다. 그런 삶은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 목적을 생각해 볼 기회조차 앗아간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생명을 피워내는 봄인 4월이 오히려 잔인한 계절이 되는 것이다. 신이 되지 못해 시인이 되었다는 말처럼 시인들은 이러한 인간의 황폐함을 시어를 빌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그 대표적인 시인이 T. S. Eliot이다. 그는 전후 서구 문명의 황폐함을 보고 황무지라는 시를 통해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고 나팔을 불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중략 현실감이 없는 도시,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한 떼의 사람들이 런던교 위로 흘러갔다.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데려갔다고나는 생각도 못했다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각자 발치만 내려 보면서언덕을 넘어 킹 윌리엄가를 내려가성 메어리 울로스 성당이 죽은 소리로드디어 아홉시를 알리는 곳으로.거기서 나는 낯익은 자를 만나소리쳐서 그를 세웠다."스테츤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작년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나?올해엔 꽃이 필까?혹시 때 아닌 서리가 묘상(苗床)을 망쳤나?오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페헤칠 걸세!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엘리엇은 이렇게 나팔을 분 대가로 노벨 문학상을 탔지만 세상은 여전히 황무지이다. 그리고 그 땅에는 생로병사의 고통이 항시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다. 그 어둠의 그림자가 갓난아기에게도 들어가니 신생아 황달이다. 황달을 치료하는 파란색광선 어머니의 뱃속에서 10달이란 세월은 짧은 기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가진 어머니의 삶이 불행하다면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거기에 세상에 나오기 위해선 어머니의 몸에 붙은 탯줄을 놓아야 하는데 그 두려움은 어땠을까? 그래 신생아의 간 기능은 두려움에 쓸개즙을 역류시키는데 그 병이 바로 황달이다. 영국의 크레머라는 의사가 관광도 하고 쉴 겸 인도를 방문하였다. 그는 인도라는 나라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여전히 문화나 문명이 발전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자신이 의사였기에 의학에 대해선 인도의 의학을 기대하지 않았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 인도의 후진성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특히 불결하게 음식을 손으로 먹을 뿐 만 아니라 그 다른 손으로는 항문을 씻어내는 것을 보고는 어이없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골마을을 여행하던 중 그는 이상한 풍경을 목격했다. 바로 마당 한가운데에 갓 태어난 갓난아이를 눈만 가린 다음 벌거벗긴 채로 거적위에 놓은 것을 발견했다. 크레머는 집 주인에게 왜 갓난아이를 그렇게 학대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말은 아이가 황달에 걸려 치료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크레머는 어이없어했다. 그는 아이 부모에게 황달의 위험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 부모는 이렇게 하면 황달이 치료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돌아선 크레머는 다시 발길을 돌며 여행을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신생아 황달을 치료하는 방법이 똑같음을 보고는 인도의 의학이 아직도 미개한 수준이라며 안타까워 혀를 찾다. 여행중 크레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첫 번째 방문했던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그곳에서 크래머는 깜짝 놀랐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그 신생아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크레머는 황당한 마음으로 그가 지나왔던 마을을 다시 찾아가 살펴보니 결과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모두 살아있었다. 급히 영국으로 돌아온 크레머는 이번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고민하던 그는 태양광선이 황달을 치료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무지갯빛 가시광선을 하나하나 황달에 걸린 아이를 쬐어보았다. 당시 영국에선 황달에 걸린 아이들이 치료가 되지 않고 악화될 때는 새 피를 수혈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피를 갈았으나 큰 효과가 없이 죽곤 했다. 그랬기에 크래머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가시광선을 쬐어 본 것이다. 처음 빨강광선은 실패했다. 주황이나 노랑 그리고 초록도 실패했다. 그가 파랑색 광선을 아이에게 쪼였을 때 황달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흥분하여 이런 사실을 의학계에 발표하였고 그 후로 신생아 황달은 파란색 광선이 나오는 인큐베이터에서 치료하게 되었다. 크레머는 실험을 통해 파란색 광선이 황달을 치료하는 줄을 알아냈어도 왜 파란색 광선이 황달을 치료할까에 대한 답은 없었다. 인도인들이 황달에 결렸을 때 벌거벗긴 채로 거적위에 놓은 이유는 바로 하늘의 파란색에 피부를 노출시키고자 한 것이다. 본래 황달이란 병은 간에서 생산되는 쓸개즙이 십이지장으로 내려가 소화 작용을 거처 대변으로 버려져야 하는데 신생아들은 간 기능이상으로 쓸개즙이 역류하여 심장으로 들어가 빨간 피와 섞이게 되어 황색을 띤 혈액이 흐르게 되어 몸과 얼굴 손과 발이황색이 되는 질환이다. 그러기에 간 기능을 활성화만 시키면 쉽게 치료될 수 있는 병이다. 하여 파란 하늘에 피부를 노출시켜 인체 속의 파란색의 색소체인 크립토크롬으로 하여금 파란색을 수용하게 하여 간을 좋게 한 것이다. 크레머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오늘날 전 세계의 신생아 병동에선 파란색 광선의 인큐베이터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파란색 광선은 신진대사를 증대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며, 성장을 촉진하고 심장운동을 느리게 하며, 강장제 역할을 한다. 파란색은 방부제 성질이 있어 근육과 혈관을 축소시키고, 염증을 완화하고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파란색은 혈액순환에도 영향을 주어 파란 광선을 쓰면 흥분을 가라앉혀 열을 동반한 증상이나 빠른 맥박, 고혈압 등의 증상에 적용하면 효과가 있다. 편두통, 뇌막염, 불면증 등의 증상도 파란색을 이용하면 편해질 수 있다. 1970년대에 유행한 청바지는 바로 쉴 새 없이 일해야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색이었다.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눈에 밟히는 청색 블루진을 통하여 사람들은 휴식과 긴장 완화를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어, 스트레스에서 오는 분노와 열을 다스릴 수 있었다. 청바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기성세대도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색이나 감색의 옷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정장색은 대개가 청색, 즉 파란색 계통이다. 요즘 대학입시나 취업에는 면접과 구술능력을 당락의 기준으로 삼는다. 걱정하지 말고 파란색 옷을 입고 목의 기운을 북돋우면 마음이 평온하고 긴장감이 없어져 조리 있게 면접에 응할 수가 있다. 파란색은 빨간색(팽창과 활력)과는 상반된 작용을 하여 냉각, 수축 그리고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체중감량이 필요한 사람은 음식을 파란색 그릇에 담아 먹으면 좋다. 귀족들이 청자를 좋아하는 이유 역시 파란색은 식욕을 낮추고, 소식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빨간색 음식은 먹음직스러운 반면, 파란색은 왠지 차가워 잘 당기지 않고 덜 먹게 되어 마음과 영혼을 고요하게 한다. 접하기 쉬운 파란색 음식으로는 블루베리, 푸른 자두, 바다에서 나는 해조류가 있으며, 이것들은 간 기능의 회복과 목의 기능에 좋다. 한편 목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보석을 쓰는 것도 좋다. 사파이어나 터키석 등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면 심신이 안정되고 불면이 해소되며 목 질환이 치유된다. 일반적으로 사파이어는 9월의 탄생석이며, 충성심과 믿음을 상징하며 사랑과 그리움을 의미한다. 자연에서 채취하기 어려운 귀한 색으로 왕을 치장하는 보석에 이용되거나 고위 성직자의 반지로 사용되었다. 영국 왕가의 선호 품으로 앤 공주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약혼반지에 장식되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약혼반지로 많이 쓰인다. 사파이어를 목걸이나 브로치를 만들어 목에 걸거나 가슴에 장식하면 목 부위의 질환들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 심리적으로 사파이어는 하늘을 상징하는 돌로 통하므로 여성이 남아를 쉽게 잉태 할 수 있다고 도 알려져 있다. 파란색 가방이나 스카프 등의 소품도 같은 효과를 준다. 다이어트를 원한다면 가급적 이런 파란 칼라로 자신을 코디하는 것이 필요하다. 파란색 힐링 명상-나의 존재는 하늘의 것입니다. 한 사공이 배로 강을 건너고 있었다.그러다 떠밀려 내려오는 작은 빈 배와 부딪쳤다.그가 비록 성격이 난폭한 사람일지라도배가 비어 있으면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사공은 그에게 무슨 말인가 했을 것이고소리를 질렀을 것이고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이런 분 냄은 배 안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다.배에 아무도 없었다면 사공은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고그저 자기의 노를 다시 저었을 것이다.사공이 자신이 타고 가는 자신의 배를 비울 수만 있다면빈 배처럼 사공이 자신의 인생의 배를 띄운다면 아무도 그 사공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진정으로 그 사공에게 분을 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파란색은 분노를 조절해 준다. 그러니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또는 하늘을 시각화하여 생각하면서 파란색을 가까이 하면 분노를 조절할 수 있다. 또한 파란색 명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신의 신성을 실현하기 위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파란색 힐링 명상 시에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단순하고 명료하고 어떤 것에 집착이 없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명상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엄마가 오면 그것을 내팽개쳐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마에게 달려가 품에 안긴다. 길들여진 것들과 익숙한 것들 그리고 습관들 철학과 종교 그 모든 것들이 장난감에 불과하다. 또한 조직에서 팀을 잘 이끌고 지도하여야 할 때에는 파란색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광경을 시각화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3초 정도 멈추고는 “나는 하늘의 힘을 받아 조직하는 능력이 있고 지도력이 있다.” 라고 확언한다. 파란색 힐링 명상 시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음악은 공간예술이고 공간은 하늘에 속하기에 거의 대부분 파랑색과 공명한다. 마룻바닥이나 소파에 편하게 누워 몸의 각 부위의 긴장을 풀어준다. 특히 목을 이리 저리 좌우 전후로 움직이고 두 눈과 귀를 잘 문질러 준다. 그런 다음 음악을 틀고는 파란색 광선이 자신의 목 부위를 감사고 있다고 시각화하면서 조용히 호흡을 조절하면 좋다. 땅에 쌓아두는 것은 모두 썩지만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모두 보물이 된다. 그 보물의 이름은 사파이어! 하늘이 인간의 신성한 삶을 위해 땅에 뿌려놓은 보석이다. 이 사파이어를 차거나 보면서 명상을 해도 아주 좋다. Healing Blue Color Tip1. 자신 만의 기도문 격언 등을 만들어 항시 외운다.2. 파란색 하늘을 자주 놀려다 보며 하늘의 도움을 요청한다.3. 기침 감기를 비롯한 목질환일 때는 반드시 파란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다.4. 다이어트 시에는 파란색 식기와 식탁보를 늘 가까이 하여 식욕을 조절한다.5. 불면증일 때는 파란색 잠옷과 파란색 조명을 활용하면서 파란색 힐링명상을 한다.6. 목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파란색 물병을 만들어 물을 담아놓고 햇빛에 3-4시간 노출 후에 마신다. 7. 갑상선 이상일 때는 파란색 터키석이나 사파이어를 목걸이로 착용하면 도움이 된다.8. 면접시험에는 옅은 파란색 와이셔츠에 진한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시험에 응한다. <글 : 박광수 교수>- 전)경기대 대체의학대학원 외래교수- 전)부산 카톨릭 간호대학원 외래교수- 전)대전대학교뷰티건강학과 외래교수- 전)장로회 자연치유 선교대학원 외래교수 - www.unicolor.co.kr 관리자 I 2018-03-20
[박광수 칼럼6] 파랑의 심리학2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하늘은 자비로워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역경을 이겨내라고 파란색을 펼쳐 놓았다. 애통하며 길 떠나는 그들의 눈에 평화의 색깔을 하늘 가득 담아 놓은 것이다. 그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힘을 내어 험한 세상의 물결을 잘 건너라고 다리를 놓아 주었다. 1970년 1월 26일 히피로 대변되던 60년대 사회에 심금을 울리는 노래 한 곡이 들려 왔다.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듀오로 평가받는 사이먼 앤 가펑클은 사랑과 헌신이라는 가스펠적 사상과 음률을 가지고 세상을 감동시켰다. 이들이 겪은 60년대는 체제와 사상을 탈피하고자 하는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전과 평화의 노래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랬기에 개인의 아픔이나 고통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오히려 사치로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있었다. 이런 때 험한 세파에 다리가 되어 준다는 노래는 아픔을 치료하는 묘약이자 평안을 주는 하늘의 말씀이었고 빛이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Simon & Garfunkle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When tears are in your eyesI w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 repeat * 당신이 지치고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낄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그 눈물을 말려 드리겠습니다. 살기 힘들고 친구도 찾아볼 수 없을 때 내가 당신의 편이 돼 드리겠습니다.(당신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마치 거친 풍랑 속에서도 버텨내는 다리처럼 나를 눕혀 당신이 무사히 잘 건너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When you're down and out When you're on the street When evening falls so hard I will comfort you I'll take your part oh when darkness comes and pain is all around * repeat twice * 당신이 너무나도 지쳐서 완전히 삶의 의욕을 상실했을 때 당신이 할 일을 잃고 길거리를 헤맬 때 당신이 해가 지고 밤을 맞이하기가 괴롭게 느껴질 때 내가 당신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어둠이 내리고 고통이 온 사방에 퍼져있을 때 당신의 짐을 내가 대신 들어 드리겠습니다.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은빛으로 물든 내 여성이여 계속 항해를 하세요. 당신의 시대가 빛을 발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당신의 모든 꿈들이 이제 서서히 실현돼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 보세요. Oh if you need a friend I'll sailing right beh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ll ease your mind** ** repeat ** 아! 그대가 만일 친구를 필요로 한다면 내가 바로 당신 바로 뒤에서 항해 할 터이니 마치 험한 풍랑위에 우뚝 선 다리처럼 내가 당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폴 사이먼(Paul Simon)이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70년 2월부터 히트해 1위가 되면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1970년도 그래미상의 ‘Record Of The Year’, ‘Album Of The Year’, ‘Song Of The Year’와, 최우수 컨템퍼러리 가곡, 최우수 반주 편곡 등의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리고는 전 세계에 퍼져 개인의 아픔과 고난을 위로해 주는 노래가 되어 현재까지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폴 사이먼의 노래처럼 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만일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하늘같은 사람일 것이다. 하늘의 뜻에 따라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늘의 색깔인 파랑이 상징하는 정신영역은 신을 따르는 인간의 의지를 담당한다. 그러기에 파랑과 연결된 목 에너지가 강하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것은 하늘이 이끄는 선택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이는 가슴에서 겪은 사랑의 아픔이나 상처도 신의 인도로 말미암아 더 좋은 결과로 이끈다는 믿음으로 인한다. 그러나 이곳이 막혀 있으면 죽음이 두려워 변절하게 되어 다시 낮은 에너지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에도 인간은 나약하여 목숨이 두려워 그 스승을 배반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베드로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은 오히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예수가 잡히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수제자인 베드로 역시 하녀의 지적에 3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를 따르겠다던 베드로는 예수가 잡히는 상황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만 했어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화를 얻었을 터인데도 깨어있지 못했기에 두려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하늘을 보는 그 단순한 행위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피카소와 목구멍 우리 속담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포도청은 지금의 경찰서이다. 죄가 없어도 거기에만 끌려가면 꼼짝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 만큼 포도청은 무서운 곳이었다. 그런데 이 포도청만큼 무서운 곳이 바로 목구멍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은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항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명제이다. 인간의 육체는 먹어야 살기에 먹는 것 앞에서는 체면이나 양심 같은 것도 팽개치고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해야 하기 때문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인 피카소 역시 목구멍이 가장 무서운 시절을 만난다.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지만 예술가에게 가난은 남들이 받는 상처는 상상 이상이다. 미처 예술을 그만 두고 목구멍을 위해 다른 일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예술가들에겐 예술이 천명(天命)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들은 그림을 통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신에 대한 탐색을 끊이지 않는다.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19세가 되던 1900년 자신이 단골로 다니던 바르셀로나의 선술집 ‘네 마리 고양이’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어두운 선술집 벽 위에 그는 데생 150여 점을 전시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자 친구인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바르셀로나를 떠나 화가들의 도시인 파리로 간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은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렉 등의 화가들이 살았던 곳으로 언덕 위에 ‘바토-라부아르’라는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안에 30여 명의 화가들의 작업실인 아틀리에가 있다. 계단은 낡아 삐걱거리고, 물도 편하게 쓸 수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습기로 가득 찬 그 건물에는 쥐와 고양이 오줌냄새로 가득하다. 참혹하리만큼 가난한 생활이 눈앞의 현실이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그의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을 당한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기 머리를 권총으로 쏴 자살하는 것을 목격한다.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곧 그림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른바 청색시대이다. 1901년부터 4년 간 피카소는 청색만으로 세상을 그렸다. 그에게 있어 청색은 목구멍의 색깔이었다. 사는 것이 무서워 자신을 도피하고자 했던 색깔이었고 세상을 향한 분노를 소리치기 위한 색깔이었다. 그의 생각을 대변하듯이 당시는 세기말의 영향으로 페시미즘 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심히 청색만을 보여줄 뿐 이었다. 그는 옷도 청색으로 입었고 모든 사람들을 청색으로 그려냈다. 늙은 뚜쟁이, 알코올 중독자, 거지, 장님, 그리고 친구 카사게마스, 그리고 절망과 가난에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군상들이 청색으로 표현되었다. 캔버스에서나마 하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청색시대를 열은 것이다. 그 청색이 바로 하늘의 색이다. 가난과 분노의 색이자 하늘의 도움을 바라는 하늘의 색이다. 피카소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지만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가난과 절망의 청색시대는 여전히 이 땅에서 가난한자들의 목을 누르고 있다. 여기 가난 속에서도 신을 위하여 등불을 켠 가난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난다"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코살라국 사위성에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밥을 빌어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어느 날 온 성안이 떠들썩한 것을 본 여인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로 돌아온다 하여 이 나라의 왕이 오늘 밤에 수천 개의 등불을 밝혀 복을 비는 연등회를 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성안이 북적거립니다.“ 이 말을 듣고 여인은 생각했다. 왕은 많은 복을 짓는구나.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어떻게 할까? 나도 등불을 하나 켜서 부처님께 공양했으면 싶은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여인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구걸하여 동전 두 닢을 마련했다.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사러 온 여인을 보고 기름집 주인은 이 기름을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 등불이라도 하나 켜서 부처님께 바칠까 합니다.“ 여인의 말에 감동한 가게 주인은 기름을 곱절이나 주었다. 여인은 그 기름으로 불을 켜 길목에 걸어두고 마음속으로 발원하였다. “저는 가난한 처지라 이 작은 등불이나마 부처님께 공양 하니 받아주옵소서"그날 밤 사위성에는 강한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서 초저녁에 켜 놓았던 등불이 모두 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작은 등불 하나만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어둠속에서 더욱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가난한 여인 난다가 켜 놓은 작은 등불이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시자인 아난다는 손으로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가사 자락으로 끄려 해도 꺼지지 않았다. 부채로 끄려 했지만, 그래도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이 그 모습을 보고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부질없이 애쓰지 말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등불이므로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의 공덕으로 여인은 다음 세상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며, 그 이름은 수미등광여래라 하리라.“ 예수 역시 부자들이 내는 헌금과 가난한 과부가 내는 헌금에 대해 설교하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자신이 먹을 것을 먹지 않고 헌금한다는 것은 신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심이란 바로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낼까? 바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파란색이 말하고자 하는 헌신의 뜻을 즉시 깨달을 수 있다. 이럴 때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맞추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의 기도이다. 이렇게 신에게 귀의하려면 자신의 판단이나 선택을 자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선택한다면 신성이 개입할 틈이 없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이르면 판단하지 않게 되어, 판단에 따르는 두려움이나 실수가 없어 매사를 신의 뜻에 맡기고 따른다. 인도의 3대 성인의 한 사람인 라마크리슈나는 신의 의지에 따르는 길을 비유를 통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원숭이 새끼는 무서울 때 어미원숭이에게 꼭 매달린다. 새끼는 어미를 놓치게 되면 떨어져서 다치게 될 까봐 떨어지지 않으려 모든 힘을 쓴다. 그러나 고양이 새끼는 가련하게 울기만 한다. 그러면 어미 고양이가 새끼의 울음소리를 듣고 와서 뒷덜미를 물고 간다. 고양이 새끼는 떨어질 위험이 전혀 없다. 엄마 고양이가 그 자신의 뒷덜미를 물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내맡기는 신앙의 길이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신에게 맞기고 신의 의지를 따를 때 그 힘은 하늘에서 오며 색깔은 평화와 평강의 파란색이다. <글 : 박광수 교수>- 전)경기대 대체의학대학원 외래교수- 전)부산 카톨릭 간호대학원 외래교수- 전)대전대학교뷰티건강학과 외래교수- 전)장로회 자연치유 선교대학원 외래교수 - www.unicolor.co.kr 관리자 I 2018-03-20
[신광호 칼럼6] 새로운 패러다임 선택이 필요하다 IT산업이 SNS시대를 이끌었다. 개인의 모든 의사소통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움직임이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다시 반복되고 있다. 새로운 문화는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오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세대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 사회는 최근 아주 큰 재난 상태에 준하는 참사를 겪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은 아직도 진행주인데 제천화재 참사, 밀양 요양병원 화재참사 등등 수십 명의 귀한 생명이 인재의 재난에서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재난이 우리를 슬프게 할지 모른다. 문제는 이런 재난의 원인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국가 사회에서는 여전히 헤매고 있고 어느 정권이든 국회이든 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아주 간단하고 개미구멍 같은 흠집이 큰 재난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패러다임이 이 개미구멍을 구분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현재 패러다임이 조그마한 개미구멍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 시스템이 상식에 맞지 않는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인재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그러면 개미구멍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한번 밝혀봐라! 현 패러다임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판단하는 개인의 성질, 성격, 성품을 구분하지 못한다. 성질이 성격이고 성격이 성품인 것 같은 패러다임이 현재의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필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개인의 성질, 성격, 성품의 차이를 구분하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대처를 할 수 있다면 한국의 집단지성은 진화를 할 것이고 대한민국의 정책 시스템은 현재의 난국을 효율적으로 해결해나갈 것이다. 이렇게 진단을 내리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는 비효율적인 갈등국면을 만들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에너지의 낭비를 아깝게 여기지 않고 즐기는 측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의 소모라 생각하고 방치하는 순간에 선진국의 집단지성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에너지 낭비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이런 추세에서 국력이 소진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IT강국이 최고의 SNS문화를 가지고 있으면 자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막고 한국의 경쟁력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것이다. 개인의 성질, 성격, 성품은 절대로 같지 않은 아주 다른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분되지 않는 개념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가? 적어도 필자가 연구해본 한의학적인 생명관에는 그 구분의 관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관점의 핵심이 천, 지, 인 삼재가 만들어내는 性이다.천성은 성질이고, 지성은 성격이며, 인성은 성품이라는 사실을 구분하고 인지한다면 한국의 혼란은 손쉽게 풀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누가 이 고지를 선점하는가에 따라서 누가 먼저 최고의 가치를 선점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이것을 먼저 하는 사회시스템이 한국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타고난 ‘성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즉 성질이라는 개념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찾아보면 개개인의 존귀하고 보배와 같은 성질이 보인다. 이것이 있기에 어떤 사람도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아를 성찰해보면 무엇을 어떻게? 라는 의문에 답을 내리는 패턴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패턴은 누구나 같지 않다. 다양한 성질을 발현하면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질을 개발하는 씨앗이 바로 성질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인권을 존중한다는 지상명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학생인권조례를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권을 존중하는 이유가 인격에 있다고 한다. 인격을 형성하는 성격을 인권을 존중하는 근거로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성질이 아닌 성격을 인권을 존중하는 근거로 삼은 것 이것이 바로 오류인 것이다. 성질이 아닌 성격을 인권을 존중하는 이유로 만들면 안되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는 성격은 ‘지성’이다. 하늘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땅에서 받은 것이다. 땅이라고 함은 몸을 의미한다. 뇌와 몸 사이에 존재하는 신경시스템은 몸을 유지하는 제어관리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 즉 성격은 몸을 유지하는 제어관리 시스템에서 유발하는 각종 생명현상을 가지고 사회적 통념에 따라서 그 지위를 형성하는 격을 근거로 서열을 매기고 있다. 즉 누구의 인격은 다른 사람의 인격에 비하여 높다는 식의 비유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격인 것이다. 그리고 성격이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격을 관찰하는 관점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에서 비롯된 욕망과 감정표현 그리고 이것을 절제하는 이성적 선택을 하는 높은 수준의 격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런 전제조건을 가지고 보면 성격이 인권을 존중하는 근거라고 했다는 한심함을 보게 된다. 즉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하는 낮은 인격을 가진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인격이 높은 즉, 이성적이고 사회성이 높은 신사와 숙녀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양아치와 같이 분노조절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문제는 다 성장한 사회인이 아니라 바람직한 인격 형성이 덜된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반교육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한심한 작태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우리 교육은 이런 한심한 작태를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 존중받는 형국을 만들었다. 정리해보면 교육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질의 고귀한 가치를 근거로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하며 소질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전개해야 할 인권조례가 존중받지 않고 다듬어야 할 인격을 근거로 삼았다는 한심함이 현재 한국의 교육풍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조례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 것인가? 못된 성질을 죽이려는 부모와 선생님의 횡포에서 보호받아야 하며 타고난 성질을 더럽다고 매도당하는 언어폭력에서 보호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교육받는 학생이 사회인으로 성장했을 때 올바른 인성을 가진 인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진다. 교육의 목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고난 성질을 발견하고 소질로 개발하고 높은 수준의 인격도야를 통해 사회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인성을 가진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성교육이라는 지혜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인성이라는 것은 타고난 천성인 성질과 건강한 몸에 내재한 지성인 성격의 발달을 통해서 사회 국가에서 만나는 사람과 환경과의 삶을 통해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품이라는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에서 대가족 시대에서 핵가족 시대가 혼족이라는 혼자 사는 개인가정을 이루는 추세를 만들고 있는 현재의 세태가 얼마나 위험한 인성을 만들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다양한 사람과 살아가면서 가치를 구연할 수 있는 성품을 가진 인재를 만드는 것이 인성교육인 것이다. 그러니 친구를 사귀고 스승님을 섬기고 가족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인성을 만드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삶의 체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를 묵살하고 오직 성적을 높여서 명문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서 풍족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성을 만들어낸 부모의 고집은 정말로 위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인성교육을 받은 자식은 부모를 배반하고 가족을 배반하고 사회와 국가를 배반하는 인성으로 자라게 되며 사회문제를 만들어내는 인재가 된 것이다. 우리의 교육에서 성적지상주의는 진정하고 가치 있는 인품을 가진 성품을 기르는 인성교육에 인색했다. 이런 인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건강할 수 있을까? 그러니 자기를 반성하지 않고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자기를 반성하기 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니 사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세월호 참사나 각종 인재로 인한 참사를 지속적으로 양산하는데 남 탓만 하다가 계속해서 같은 패턴의 재난으로 인해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자기반성과 인품을 갖추는 인성교육이 이 사회를 채울 때까지 미래의 불행은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져 있다. 한국의 교육은 목적이 잘못 설정 되어 있다. 「교육법」 제1조에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한국은 교육법 제 1조의 패러다임이라는 덫에 갇혀있다. 여기서 잘못된 교육 목적이 한국의 교육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미래를 암울하게 했다. 왜 이런 설명이 가능한가? 세 가지 문제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제일의 오류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함이 우리나라 교육의 목적이다. 이것은 문제가 없다.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이라는 단어를 알기 쉽게 풀어 제시한 문구이다. 그런데 이런 홍익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이념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인류공영의 이상실현도 단지 이념일 뿐이다 이것은 시비거리가 된다. 이데올로기적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함정을 스스로 판 것이다. 理念이라는 것은 모든 구성원이 긍정할 수 있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개개인의 이념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목적을 설정할 때 생각을 바탕으로 둔 모호한 선택 보다는 확고한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홍익인간은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이다. 단군신화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정신적 기틀이다. 이것을 이념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한국의 교육은 끊임없는 시비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다. 교육은 홍익인간을 길러내는데 목적이 있다. “무엇을?” 이라는 목표와 “어떻게?”라는 수단을 전제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교육법 1조는 목적도 모호하고 목표와 수단도 모호하다. 그러니 현재의 교육이 한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한국의 교육의 목적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인성을 가진 인재를 길러내는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 즉 홍익인간은 성품이 높은 인성을 갖춘 인재를 사자성어로 간략하게 표현한 유서 깊은 단어이다. 이것을 교육법에서 이념으로 정의한 만행을 교육학자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2.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한다는 실천이 두 번째 오류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한다고 했는데 인격이 무엇인가? 인격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어 있다. 인격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① 사람으로서의 품격.┈┈• ∼ 수양┈┈• ∼을 갖추다┈┈• ∼을 존중하다.↔신격.② ⦗심리⦘ 개인의 지적(知的)·정적(情的)·의지적 및 신체적 측면을 총괄하는 전체적 통일체.③ ⦗윤리⦘ 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 자기 결정적이고 자율적 의지를 가지며, 그 자신이 목적이 되는 개인.④ ⦗법률⦘ 법률 관계, 특히 권리·의무의 주체이며, 법률상 독자적 가치가 인정되는 자격.⑤ ⦗종교⦘ 신에 대해, 인성(人性)을 갖춘 품격. 사전적 의미 다섯 가지를 보면 인격이라는 것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일까? 교육이 인격을 완성하는 마법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오류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육을 모두 받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있는가? 우리는 사전적인 정의를 보면서 인격에 대한 해석이 다섯 가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회 통념상 인격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다. 이것이 심리학적 인격과 윤리적인 인격과 법률적인 인격 그리고 종교적인 인격을 보면서 참으로 혼돈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한마디로 인격이 무언지 말해보라고 하면 답할 수 있을까? 이런 모호한 인격이란 개념에 완성이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우리 교육법 1조는 난센스를 실현하는 마법을 현실에서 구현해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인격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필자가 제시하는 인격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렇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인격적인 차별화가 일어난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린 시절에 본능에 의지해서 삶을 구가한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본능적인 인격인 것이다. 이런 인격이 점차 자기 의지를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욕망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물론 본능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일으키는 욕망이긴 하지만 세상과 소통하려는 욕망에 의지하는 인격이니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화내고 슬퍼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놀라는 감성을 일으킬 수 있는 인격이 발현된다. 교육을 받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능과 욕망과 감성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인, 의, 예, 지, 신 등의 덕성을 발현하는 인격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교육을 받으면서 최선으로 달성하는 인격적인 지위인 것이다. 인격은 성격으로 인해서 발현된다. 그러니 성격에 의해서 발현되는 인격의 완성은 모든 국민에게서 기대하는 것 자체가 오류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격이라는 단계적인 성취의 수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본능에 의존하는 성격이 만들어낸 인격, 욕망에 의존하는 성격이 만들어낸 인격, 감성에 의존하는 성격이 만들어낸 인격, 덕성에 의존하는 성격이 만들어낸 인격이 구분된다. 그리고 교육은 덕성에 의존하는 성격이 만들어낸 인격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이런 인격에 도달하지 못한 인격체는 사회에서 홍익인간으로서의 인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범죄, 폭력, 정신적 장애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무수히 확인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교육법 1조는 난센스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악법인 것이다. 3.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 오류 교육의 목표로 제시한 수단 중에서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는’이라는 문구가 세 번째 오류이다.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에서 ‘자질’에서 資質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이다. 자질은 인간 본연의 천성이 만들어낸 성질의 가치를 의미한다.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성질이 있으니 이것이 자질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대각견성의 목적이 되는 본성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질을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이 될 수 있는 본성 성질로 축소시켜 놓았다. 어찌보면 바람직한 인간 본성을 설명한 것 같지만 사람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게 될 본성 성질을 획일적인 잣대인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이란 함정에 가둬놓는 어리석음이다. 사실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인성을 구유하게’라고 해서 인성교육이라는 수단을 목표에 넣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소견이 교육학자에게는 없다. 필자의 이 주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교육학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틀린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천성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천성이라는 성질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천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견성하고 각성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교육현장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빠르게 또는 늦게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육은 이런 개인의 천성 또는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소질 또는 자질이 고작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이 되는데 쓰여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소질과 자질의 가치를 형편없이 폄하한 폭력이다.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이 되는데 필요한 것은 지성인 성격과 인성인 성품이다. 인, 의, 예, 지, 신과 같은 덕성과 인성교육을 통해서 바람직한 품성을 길러내는 것이야 말로 제대로 된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한다. 우리의 부모는 이것을 곡해한 것이다. 자질을 개발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자녀를 학원과 학교에서 묶어 놓고 끊임없이 성적을 높이기 위한 모래성 쌓기를 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들 자녀는 덕성이 개발되어 있지 않은 성격이 되었으며 이런 덜 개발된 성격은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이 될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교육법대로 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누구 한사람 지적하지 않았다. 단지 어떻게 할 것인지 답답해하는 지사만이 넘치고 있다. 이상의 세가지 오류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법 1조의 패러다임에 갇혀서 우리 교육의 미래가 대한민국을 힘들게 할 것이다. 원인을 모를 수많은 사건 사고가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재난으로 확대되는 동안에 언론과 정부 정책은 오락가락하고 이것을 보는 국민은 국가를 향해서 성토를 한다. 정작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스스로 도덕적 오류를 범하고 사회통념으로 변명하는 국민 개개인의 합리화하고 넘어간다. 이런 인성을 만들어낸 교육에 대해서 끝없는 면죄부를 준다. 이렇게 관대한 국민이 있는 한 우리 문화는 영원히 선진국 수준의 문화로 진입하는 문턱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교육해 내는 데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명을 존중하고 우주와 소통하면서 진화하는 새로운 개념의 패러다임을 열어야 한다. <글: 달래촌한의원 원장 신광호>- 한의외치요법학회 창립(부회장)- 강원도 한의사회 정책이사- 사한의외치요법학회 회장- 대한한의사협회 약무이사-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 하나로동국대한의원 원장- 하나로 한의원 개설 및 원장 (달래촌 한의원으로 변경) 관리자 I 2018-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