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자녀 양육하기
▲ⓒSamantha Sophia/Unsplash
최근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 디렉터인 에드 스테처(Ed Stetzer) 목사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자녀 양육하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진실이다. 특히 도덕성과 성(sexuality)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는 더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자신감있는 가치를 가르칠 의무가
부모에게 있다. 따라서 분명한 질문은 새로운 도덕 질서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에 뿌리를
둔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삶의 방식을 표현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할
것이다.
첫째,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율법과 규칙의 목록을 잘 따르는 것에 두는 어린이와 십대들은
결국 그 규칙에 반항하거나 혹은 그 규칙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교만해지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뿌리를 둔다면,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 주변의 문화적 변화의
한가운데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문화의 도덕성 문제, 특히 성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확실하다. 유대-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표준은 "옳은" 일이며
"선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 합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합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 문화의 세계관에서
"모두가 아는 것처럼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호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현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것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인이 믿는 세계관의 큰 틀과 그 이유-성경에 대한 이해와 성경이 가르치는 바, 그리고 그 이유-아이들과 십대들에게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선하고 착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어떤 면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셋째, 세상과 문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변명할 필요가 없다.
현실은 이렇다. 우리가 도덕적 우수성의 기준을 지키면 자녀들은 절망에
빠지거나 교만해진다.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절망하며 혹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가진
것에 대해 교만해진다. 죄의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둘 다 죄다.
대신에 더 좋은 접근법은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우리 모두가 죄와 싸우도록 돕는 것이다. 연약함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우리의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과 개인의 연약함을 인식하는 겸손한 접근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존하게 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아이들의 삶에 널리 퍼져있는 관습에 순응하는 폭정을
깨뜨려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는 것이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현실이 바뀌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진 것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이 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어린이들과 십대들은 잘 알려진 일본 속담인 "모가
난 손톱은 두드려야 한다"처럼 세상의 관습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인에게는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처럼 우리가 어떻게 빛나고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함으로써 어두워진 문화 속에서 눈에 띄는지 이야기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자(빌립보서 2:16).
포용할 것은 포용하지만 수동적으로 관습에 순응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임을 받아들여라.
다섯째, 마침내 우리는 자녀들과 우리의 싸움, 연약함, 실패를 나누어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과 그의 표준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불완전한 창조물임을 알게 해야 한다.
현실에서 당신과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유혹을 받았거나 그 유혹에 굴복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경우 공유하길 원한다. 기회가 생길 때 자녀들과 동료가 되어 함께 투쟁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우리는
다른 시기와 다른 방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서 함께 죄와 투쟁하고 싸우는
동료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한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즉, 자녀들에게 우리가 특별한 사람들임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쳐주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 : 9, CSB). 특별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차이점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정체성에 뿌리를
둔 방식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 하셨으며, 그러므로 우리를 아시며,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삶의 지침을 주신다. 그러한
지침은 세상과 다른 삶을 살 가치가 있다.
이 새로운 도덕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뿌리내린 도덕으로 되돌아간다. 역사적으로도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세상 과는 다른 우리가 사는 방식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이미경 기자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236 관리자 I 2018-03-09
복음이 지닌 ‘문화적 포용력’에서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점[세계 기독교 내다보기 (5)] 세계
기독교의 도래, 그 원동력을 찾아서(2)
이 글은 전편 '세계 기독교의 도래,
그 원동력을 찾아서(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편집자
주
3. 서구 기독교의 쇠퇴와 세계 기독교 시대의 도래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쇠망 속에서도 복음은 로마 제국의 위협을 가하던 이민족들에게 심겨져 그 속에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기독교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 가장 번성하게 되었죠. 즉 소위 서구 문화권 내의 기독교가 당대 기독교의 대변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서구 기독교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길래 당시 기독교를 대변했다는 말까지
할 수 있는 걸까요? 서구 기독교의 위세를 대변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관련된 통계 수치들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유럽/북아메리카 인구
대비
1910년 유럽 기독교인 비율:
94.5%
1910년 북아메리카 기독교인 비율:
96.6%
-전 세계 기독교 인구 대비
1910년 유럽 기독교인 비율:
66.3%
1910년 북아메리카 기독교인 비율:
14.9%
1910년 유럽/북아메리카
기독교인 비율: 81.2%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치들이 눈에 띄시죠? 위 통계
수치들에 따르면, 1910년 당시 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인들 중 약
90% 이상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즉 대략 열 명 중 단 한 명만이 비기독교인이었던 것이죠.
더욱이 전세계 기독교인들 가운데 유럽과 북미 지역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더욱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 기독교 인구 대비 유럽/북미 지역 기독교인의 비율은
자그마치 81.2%였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1910년 당시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지역에 몰려 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서구 기독교는 (적어도) 수치
상으로 당대의 기독교를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위세 속에 서구 기독교는 스스로를 '기독교의 시대'를 일구어 나갈, 그리고 '세계 선교의 과업을 완성할 주역'으로 여겼습니다. "이 세대 안에 세계의 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를 이루어 내겠다는 당대의 당찬 포부가 알려주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당대 기독교를 대변하던 서구 기독교가 세계 선교에 매진하고 있을 그때,
역설적으로 서구 기독교 안에서는 다양한 쇠퇴의 징후들이 포착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더니즘이라는
사조가 만연해지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경험하는 등 수많은 환경적 변화에 서구 기독교가 대응해
나가는 과정 가운데, 서구 기독교는 점차 내적인 동력을 상실해가며 쇠퇴 국면에 들어서게 된 것이죠. 한 도표를 토대로 이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전세계 기독교인 인구 대비 지역별 기독교인 비율 그래프(Global
Share of Christians by Region, 1910-2050). ⓒPew Research Center
위 도표는 전세계 기독교 인구 대비 지역별 기독교인의 비율에 대한 그래프입니다.
1910년, 2010년, 그리고 2050년에 각 지역 기독교인의 수가 전 세계 기독교 인구 중 몇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래프이죠.
우리는 이 그래프에서 유럽 기독교인 비율이 눈에 띄게 급락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10년에 전 세계 기독교인 중 66.3%를 차지하고 있던 바로
그 유럽이 2010년에는 25.5%로 급감했고, 2050년에는 15.6%로 더욱 감소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죠.
북미 지역의 기독교인의 비율 역시 유럽에 비해선 완만한 감소이지만 확실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인구 중 14.9%를 차지했던 1910년부터 100년이 지난
2010년에는 12.3%로, 그리고 2050년에는 9.8%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말이죠.
하지만 서구권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을 그 때, 이른바 '서구권 밖의 지역'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선교를 통해 비서구 지역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고,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910년 기준 전세계 기독교 인구 대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기독교인의 비율은 1.4%에 그쳤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0년 그 비율이 23.9%까지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통계에 따르면, 이러한 비율은
계속 증가하여 2050년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약 38% 가량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밀집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필립 젠킨스(Phillp Jenkins)는 이러한 맥락에서 비서구
문화권 기독교의 성장, 특별히 아프리카에서의 기독교의 놀라운 성장을 염두하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을 대변할 수 있는 전형적인 인물'은 '나이지리아 한 도시에 있는 여성'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역전 현상, 곧 서구권 기독교가 쇠퇴하는 동안
비서구권 기독교는 급속히 성장하는 이러한 추세는 (특히)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걸쳐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 서구권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발전해왔던 기독교가 이젠 서구 문화권을 너머 전세계에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세계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문화로 침투해가는 기독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서구 문화권을 너머 전 세계로 향해 갔습니다. 기독교의 맹주임을
주장했던 서구 지역 기독교가 쇠퇴를 맞이하는 중,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모든 제국은 사라졌으며 유럽의 세계 주도권도 무너졌다. 유럽 기독교의 쇠퇴도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문턱에 서 있다. 이제는 기독교의 중심이 남반구에서 올라오게 될 것이다. ... (기독교는) 다시 한 번 문화의 경계를 넘음으로써 살아남은
것이다(책 <기독교의 미래>)."
4. 복음이 지닌 문화적 포용력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맞이했던 '세 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대 문화권에서 발흥한 기독교가 유대 지역을 넘어
이방 세계로 전파된 시점, 그리스-로마 문화로 대변되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넘어 이민족에게까지 전파된 시점, 그리고 서구 문화권 안에서 번성하던 기독교가 서구 지역을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어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까지.
이 세 시점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의 한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곧, 문화적 경계를 넘어 전파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그리고 (앤드류 월스의 설명처럼) 기독교는 문화적 경계를 넘는 이 시의적절하게
전파로 인해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그 전체 역사를 통해 문화적 경계를 넘어 전파되었다. 종종 바깥 세계의 새로운 지역이 기독교의 잠재적인 중심지로 등장하곤 했다. 독자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생명력은 타 문화권으로 전파됨으로 유지되었다.
이렇게 시의적절한 전파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시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발전은 연쇄적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지역이 기독교의 종주국으로 등장했다(책 <기독교의 미래>)."
만일 우리가 잠시 기독교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기독교가 어떠한 '특정한 기독교 문화' 혹은 '특정한 기독교 문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대 기독교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혹은 또 다른 당대의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문화권 혹은 문명조차 영구히 지속되는 '기독교의 특정 문화 혹은 문명'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되려 기독교는 특정 문화 혹은 문명을 고집스레 취하기보다, 어떠한
문화와 문명을 만나게 되든 그 속에 스며들어 복음의 열매를 다채롭게 맺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기독교의 중심은 (아래 그림이 보여주듯) 역사의
흐름 속에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A.D. 33부터 A.D.
2100까지 기독교의 통계적 중심(center)의 변화를 추적한 지도.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33
결국, 타문화권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문화 속에서 성장해 나간 기독교의 모습은 복음의 능력, 그리고 세계 기독교가 도래하게 된 중요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곧 문화적 포용력이 그것이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문화도 포용할 수 있는 복음은 기독교의 능력이자, 원동력이
되어왔습니다. 비록 그 문화가 당대 기독교의 종주국임을 내세웠던 이들(예, 로마 제국)에게는 추잡하고 더러운 야만인들(Barbarian)의 문화였다 할지라도, 복음은 그 문화 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문화를 복음의 영향력으로 정화시켜 나가며 기독교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게 하였죠.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복음의 역사는 오늘날 '세계 기독교 시대의 도래'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5. 겸손, 그리고 서로를
알아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역사를 바라보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우리는 기독교 역사 속 '기독교 중심지'임을 내세웠던
곳들의 현재 모습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대한 교세와 화려한 기독교 문명을 구축했던 수많은 지역과
문화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음을 기억해보면서, 오늘날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만
하는 것이죠.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교세와 규모, 그리고 가시적인 결과들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그리고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약하고 낮은 자들을 들어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것을 기억하며, 겸손의 자리로 향해가면서 말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새로운 문화권에서 자라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알아가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종종 당시의 주류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예상치 못한 문화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권 기독교의 놀라운 성장은 우리에게 '그들을 알아가야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점차 내부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될 한국 기독교에 건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그리고 차후 기독교의 또 다른 중심으로 등장할 지도 모르는 그들과 동역의 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타문화권' 그리스도인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녹록치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한 나라 안에서 한 언어를 사용하며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렇게 어려운데,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신학적 강조점을 지닌 이들과의 관계는 더욱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초대 기독교의 이야기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도저히 허물 수 없는 벽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 '둘이
하나가 된 일', '화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화해를 이룬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이 실제 삶 속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을 나누던 벽이 허물어졌고 화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화해를 이루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상 과거에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탈바꿈을 하는 과정에서 계속 반복된 일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 역사 및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책 <기독교의 미래>)." 서동준 강도사 총신대학교 신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였다. '세계기독교학'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post.naver.com/seodj59)※각주는 생략했습니다. 각주 보기: https://goo.gl/4jRgky[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서동준 강도사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235 관리자 I 2018-03-09
앗쌀람 ‘이슬람 바로알기’ 무료 세미나 개최3월 24일부터 5월 26일까지 매주 토요일 한국성서대학교서 진행
아랍문화연구 및 이슬람 선교 단체인 앗쌀람이 '이슬람 바로알기' 무료 세미나를 개최한다.
앗쌀람 세미나는 3월 24일부터 5월 26일까지 9주에
걸쳐 매주 토요일 오전 9~12시 서울 중계동 한국성서대학교 복음관
401호에서 진행된다.
주최 측은 "이슬람 관련 전문가들과 각 신학대학 선교학 교수님들이
강사로 나서 이슬람의 시작부터 무슬림들의 신앙과 문화, 이슈까지 모든 것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 선교 관심자, 선교사, 목회자, 평신도뿐만 아니라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
앗쌀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품고 '이슬람 문화 탐방'과 '앗쌀람 정기세미나'를
진행하여 한국교회가 아랍 문화를 경험하고, 이슬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여 무슬림 선교에 비전을 품을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담당하는 선교단체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이지희 기자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231 관리자 I 2018-03-09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21세기 기독교인들의 사명”무슬림선교훈련원 봄학기 3월 13일부터 12주간 진행
무슬림선교훈련원 2018년 봄학기 프로그램이 오는 3월 13일부터 5월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서울 종로5가 연동교회에서 12주간 진행된다.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이동석 목사,
이슬람대책위원장 문영용 목사)과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유중현 목사, 이슬람대책위원장 강승빈 목사)가 협력하는 이
선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국교회를 살리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며, 무슬림 영혼을 살리는 일에 헌신할 일군을 양성하기 위해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진행되어 왔다.
이만석 무슬림선교훈련원 원장은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21세기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라며 "이슬람을 알지 못해 치안 불안과 사회 갈등이 더 증가한 유럽교회와 유럽사회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고, 한국교회가 먼저 깨어 우리나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만석 목사는 또 ▲인간은 복종의 의무뿐 권리는 알라의 것이라는 이슬람의
주장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지키고' ▲무슬림이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꾸란 11:46)는 주장에서 '우리 가정을 지키며' ▲기독교인은 가장 사악한 피조물(꾸란 98:6)이라는 주장에서 '우리
교회를 지키고' ▲테러는 무슬림의 의무(꾸란 2:216)라는 주장에서 '국가 안보를 지키고' ▲비무슬림을 적으로 보고 전쟁을 선포(꾸란 8:39)하는 주장에서 '후손들에게 평화를 물려주며' ▲우리의 적이 아니라 악한 영에 속고 있는 우리 형제인 '무슬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기독교인이 이슬람의 정체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봄학기 강사로는 이만석 목사(이슬람 선교 32년)를 비롯해 강승빈 목사(전
우크라이나 선교사), 김성운 고신대 교수(전 터키 선교사), 박종상 전 한장총 이슬람대책위원장(전 아프가니스탄 선교사), 김요한 둘로스 대표(전 이슬람
T국 선교사), 김승규 전 국정원장, 이혜훈
의원, 매튜 선교사(이집트 카이로대 졸업), 전호진 전 캄장신대 총장, 김종일 서울외대 초빙교수(전 터키 선교사) 등이 나선다.
담임목사, 교육목사 등 교회 지도자,
이슬람권 선교 관심자 및 선교사 지망생, 이슬람 전문가 강사 요원, 국내 무슬림 전도 헌신자, 무슬림 선교 중보기도 사명자 등을 대상으로 70명을 모집하며, 등록금은 1학기 20만 원(부부 등록 시 30만
원)이다.(문의
010-7477-6629, 2mtc@hanmail.net)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이지희 기자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230 관리자 I 2018-03-09
한교총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 북미간 대화 등 합의 환영”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의 초대에 '5월 내 방문'을 발표한 가운데, 한국교회총연합은 앞서 남북 정상회담 발표와 관련한
성명을 지난 7일 발표했다.
이들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와 비핵화가 포함된 북미간
대화 등 당사자간 대화 개최 합의를 환영한다"며 "이번
정상회담이 한반도 긴장완화와 민족 공존은 물론, 민족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진전된 방안과 행동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다음은 성명 전문.
남북 정상회담 관련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성명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와 비핵화가 포함된 북미간 대화 등 당사자간 대화 개최 합의를 환영한다.
본회는 3·1절 성명에서
"남북 정부는 민족의 자주와 완전한 독립인 공존과 통일을 위해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에 전력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이를 위해 핵과 미사일 개발은 물론 상대를 제거하려는 적대 정책을 폐기하고,
민간 교류 협력과 인도적 지원, 개성 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협 사업을 복원하라"라고 밝힌 바 있다.
남북 정상은 적대시 정책 폐기와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 북미간
대화는 물론 주변국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기 바란다. 또한 이번
정상회담이 한반도 긴장완화와 민족 공존은 물론 민족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진전된 방안과 행동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시민사회와 한국교회는 민족 통합을 저해하는 남남갈등을 조장하지 말고, 새로운
통일운동과 민족 통합의 길을 모색하여 주기를 바란다.
한국교회총연합 소속 교단들은 남과 북의 정상간 회담을 지지하며, 핵
없는 한반도, 전쟁 없는 평화정착과 민족화합을 위해 계속 진력할 것이다.
2018년 3월 7일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전계헌 최기학 전명구 이영훈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237관리자 I 2018-03-09